상단영역

본문영역

[리뷰] 게임으로 빚어낸 자아의 낭독 '디스코 엘리시움 파이널 컷'

발상의 전환과 고집이 혁신 이끌어 … 디테일을 향한 열망, 완성도로 귀결

  • 안일범 기자 nant@khplus.kr
  • 입력 2021.07.22 14:29
  • 수정 2021.07.22 16:43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령 802호 기사]

차갑고 냉혹하다. 생각을 날카롭게 갈아 비수로 만든다. 그 비수로 틈날 때 마다 찌른다. 기습이다. 함정에 가깝다. 한발 물러서서 협상을 요구하지만, 개발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돼 있다. 게임이란 룰 속에서 저들은 신이다. 자신들의 공간에 초대된 기자로서는 답이 없다. 미끼를 물어 버린 이상 결국 당할 수밖에 없다. 피투성이가 된 채 게임을 끈다. 별수 없다. 끔찍한 게임이다. 그 어떤 게임보다 무섭고, 잔인하고, 끔찍한 게임을 플레이 했다. 오직 ‘단어의 나열’과 ‘러프한 비주얼’만으로 기자를 가지고 놀았다. ‘악마의 재능’. 찝찝함을 감출 수 없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들 세계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번엔 나도 ‘경험’을 쌓았으니, 조금이나마 레벨이 올랐을 터다. 철저히 방패를 준비하고 기습에 대비하나. 기자에게도 ‘방어 기제’란 방패와, ‘나의 삶’이란 무기가 있지 않은가. 타락을, 변화를, 각성을 촉구하는 속삭임 속에서, ‘나만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디스코 엘리시움 파이널 컷’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주인공은 ‘형사’다. 엄밀히 말하면 ‘민병대’에 가깝다. 끔찍한 사건 현장을 여러 번 다녀서인지 살짝 맛이 갔다. 술을 하도 마셔서 필름이 끊긴 어느 날. 몸은 눈을 떴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름도 모른다. 방금 게임을 시작한 게이머만큼이나 당황스럽다. 순간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홀로 남은 방 속에서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다. 바로 ’내면의 목소리‘다. 소위 ’생각‘이 ’목소리’로 표현돼 들리는 현상. 그렇다. 이 형사는 이미 글러 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순히 목소리를 따라가면서 게임은 전개된다.

‘천재 형사’와 ‘게이머’의 간극
‘목소리’는 박식하다. 온갖 지식을 꿰차고 있으며, 순간적인 판단력도 뛰어나다. 어쩌면 맛이 가기 전, 그러니까 ‘목소리’가 형사의 것이었을 때 기준으로 형사는 굉장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보면 온갖 상황들을 판단할 수 있으며, 정보를 취합해 머릿속에 저장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오래된 서적이나 음악, 기계, 모델 넘버까지도 모두 ‘저장’하는 수준이다. 단지 굉장히 ‘수동적’이어서 ‘질문(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활동하지 않는다. 보이는 상황만 놓
고 보면 ‘형사’와 ‘형사 속 또 다른 무언가’가 끊임없이 대화한다. 발상을 바꿔 보면 형사의 몸속에 ‘플레이어’가 들어가면서, 진짜 형사는 ‘목소리’가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플레이어를 위해 형사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떠든다.
단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도 쉬지 않고 떠드는데, 그 정도와 수위는 검열받지 않는다. 조용한 방에 틀어 박혀 생각을 할 때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온갖 끔찍한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해 트라우마 스위치를 당기기도 하고, 엉뚱하고 터무니 없는 목소리들이 여과 없이 ‘훅’치고 들어오면서 속삭인다.
 

살인사건 현장 속으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 보면 이미 형사는 ‘사건’에 휘말려 있다. 숙소 옆 나무 위에 ‘시체’가 걸려 있다. 그렇다면 시체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 왜 죽였는가. 질문에 해답을 얻기 위해 추리가 시작된다. 게임은 엄밀히 말하면 포인트 앤 클릭 방식에 가깝다. ‘원숭이 섬의 비밀’과 같은 어드벤쳐게임처럼 특정 장소에 가서 화면을 클릭하면 단서를 얻는다. 당연히 목소리와 대화가 시작되고 내면의 세계와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가지 중요한 점. 단서는 반드시 사물이나 상황, 정황등으로만 남지 않는다. 바로 ‘탐문 수사’가 가능한 점이다. 이제 주인공과 ‘목소리’외에 동료나, 동료나 정보원, 용의자 등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악마의 재능’이 연주를 시작한다. 등장인물만 50명이 넘어가는 오케스트라. 단서는 단서를 부르고, 사람은 사람을 부른다. 결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조작된 단서, 내면의 유혹 등이 어우러진 가운데 유저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TRPG와 어드벤쳐의 중간 단계
이제 모든 것은 자유다. 누굴 만날지, 무엇을 선택할지 모두 유저들의 선택에 달렸다. 전개도 자유롭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 마다 전개가 다르며, 결과도 조금씩 다르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그 핵심에는 ‘능력치’와 ‘주사위’가 자리잡는다. 개발팀은 각 상황에 맞게 변수를 대거 삽입했고 분기를 결정하는 부분에 이를 계산하도록 설정했다. 일종의 TRPG와 유사한 시스템인데 특정 행동을 하려고 하면 성공 유무를 ‘주사위’로 결정한다. 이를 보정해주는 역할로 ‘능력치’가 존재하는 식이다. 일례로 경찰로서 공무집행을 내세우려면 ‘권위’능력치가 필요하다.
 

과도한 이데올로기 표현에 난색
아무리 수많은 텍스트를 가용하더라도 게임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특정 사건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거나, 큰 사건에 미리 개입해 이를 무마하는 것과 같은 자유도는 없다. 결국 준비된 분기가 많을 뿐 큰 가지는 변하지 않는 점이 게임의 가장 큰 한계다.
이 과정에서 제작진들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 유저들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점도 아쉬운 점이다. 곳곳에 소위 ‘가치 판단’을 위한 ‘함정 카드’를 숨겨 놓고 부지불식간에 이를 선택하도록 만들어 유형을 결정짓는다. 그들이 심어둔 잣대를 대놓고 들어내며 이 ‘카테고리’에 소속되는 느낌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입기를 원하며, 게임적 요소와 스토리텔링 적 요소, 심리적 요소 등을
결합해 이를 정당화하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은 노골적이기 까지 하다. 조롱과 협박, 압력 등을 행사하면서 악마의 속삭임을 들려준다. 프로파간다가 연상되는 부분들이 다수 있다. 결국 ‘선택’을 강요하는 문제는 이 게임이 가진 옥에 티다. 반대로 보면 이 ‘선택’을 알리기 위한 열망과 고집이 바로 완성도를 향한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작전을 감내할 수 있다면 게임은 철두철미한 스토리텔링을 풀어 놓는 예술 작품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단 회피가 답이다. 기자 역시 회피를 택한다. 그들의 영억에 한 발 걸친 뒤, 나의 영역으로 넘어와서야 뒤 늦은 반격을 개시해 본다.

 

[경향게임스=안일범 기자]

저작권자 © 경향게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